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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부정공>절도사조공부자사실서(節度使趙公父子事實叙)
節度使趙公父子事實叙 上之三十九年癸巳余南遊至順天府所謂富有村村故有溪山之勝村之中有孝子前副正趙瑜之閭鄉人士立祠曰謙川謙川本邨之號也副正公淳昌人仕于高麗麗亡始居于邨隱跡養親我 朝以漢城尹累徵之不起至 莊憲王嘉其節行 命以孝旌之特不書漢城尹者猶係之前朝以表其忠也太學士雷淵南公有容爲之記旌閭之碑甚詳既又書公之子節度崇文與其子哲山父子俱與六臣事及於禍云嗚呼烈哉趙氏三世足以樹百代之風聲也副正公既蒙 聖祖褒異之如彼卓沒而祭于社至今赫赫照人耳目獨節度公父子湮滅不稱於世而不與於爼豆之享者何也余就徵其世于其後人得節度公父子十世孫顯範文行士也出其世譜譜備載副正公始終至於節度公父子只系其世而已行治生卒無所錄焉則公父子俱與六臣事及於禍者何所徵焉及讀其記節度公父子事實者曰按昌寧成氏譜曰成達生子勝武科官歷兵使至都摠制丙子被禍女趙崇文淳昌人官兵使丙子成三間獄事時父子被禍豊壤趙氏譜曰趙云价女成達生昌寧人判中樞父文肅公石瑢子副摠管勝與子三問同被丙子禍子參軍塍女參判清州韓惠女殿直南平曺楶女兵使淳昌趙崇文與子哲山六臣殉節時同被禍余於是起而歎曰嗟乎節度公父子同死於六臣之難信而有徵也趙氏之譜闕而不書噫其隱而愈顯也適見其旣之嚴也成氏之譜成於 弘治癸丑則其去丙子六臣之難厪三十八年慵齋成公俔爲序之成公于 光廟八年壬午及第丙子事故其目睹耳則節度公父子同死於六臣之難者尤大彰明較著也悲夫若節度公父子與六臣者古所稱生同志死同傳者而趙氏之譜闕而不書向所謂隱而愈顯者豈不葢信然哉嗚呼彼六臣者既已表顯於世節度公父子獨不列於褒揚者故 朝家之闕典而况副正公忠孝節行既有爼豆之所則有子若孫克肖而能繼之者顧不得腏享於謙川之祠者寧不爲鄉人士之羞而雖行路之人莫不爲之徘徊而太息也余又讀副正公墓碣文文即渼湖金公元行所撰也特書兵使之子曰哲山父子當 光廟之世同與六臣之事以死之言先生忠孝不獨在於其身而能世于其家又如此盖其意亦悲節度公父子之死雖掩翳於一時而將以爲萬世臣子之勸則余於此爲之三復也余既式謙川之閭而重有感於節度公父子忠孝大節克世其美而當時事不可詳則文籍蕩滅固其然矣幸而昌寧豊壤二氏譜者可以質趙氏之闕文而雷淵渼湖所以屢書不一書者得有所考焉而趙氏文獻之記於是乎可以傳之於無窮也顯範泣而謝曰顯範不肖卒無以自免於不明不仁之罪願有以識之使得以藉手焉余亦慨然辭不獲謹以所感於中者書諸節度公父子事實記之後 是年冬 光山後人 金福鉉 書 절도사조공부자사실서(節度使趙公父子事實叙) 상(上) 三十九년 계사년에 내가 남으로 향하여 순천부에 이르니 이른바 부유촌(富有 村)이란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옛 부터 산수의 경승(景勝)이 있고 마을 가운데 효자 전부정 조유의 정문이 있으며 고을 선비가 사우를 세워 겸전(謙川)이라 하였으니 겸천은 이 마을의 이름이다. 부정공은 순창 사람인데 고려 조정에서 벼슬하다가 고려가 망하자 비로소 촌에 살며 자취를 숨기고 어버이를 봉양하므로 이조에서 한성윤(漢城尹)으로써 여러 번 불러도 응하지 아니하니, 세종대왕께서 그 절행을 가상(嘉尚)히 여겨 효행으로써 정려를 명하면서 특별히 한성윤을 쓰지 아니한 것은 오히려 전조(前朝)에 충직함으로써 그 충성을 표함이 없다. 태학사(太學士) 뇌연(雷淵)이 이를 위하여 정려비에 기록함이 심히 자상하고 이미 또 공의 아들 절도사 숭문(崇文)이 그 아들 철산(哲山)과 더불어 부자가 함께 六신의 일에 참여하여 화를 입었다고 썼으니 아! 열렬하다. 조씨 三대가 족히 백대에 성교(聲 敎)를 세웠도다. 부정공이 이미 성조(聖朝)의 이와 같은 탁이(卓異)한 포양을 받고 죽은 뒤에 사우에 제사한 것이 지금까지 빛나고 빛나 사람의 이목(耳目)에 비추는데, 홀로 절도공 부자가 빠지고 끊어져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사우의 향사에 참여하지 못함은 어찌된 일인가. 내가 그 세덕을 그 후 너에게 물으니 절도공의 十세손 현범(顯範)은 문행(文行)이 있는 선비로 그 세보(世譜)를 보이는데 부정공의 행적은 자상히 기록되었으되 절도공 부자는 다만 그 세계만 기록되어 있을 뿐 행치 생졸(行治生卒)이 기록된 바 없은즉 공 의 부자가 함께 六신의 일에 참여하여 화를 입은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이어 서 그 절도공 부자의 사실을 기록한 거사를 읽어보니, 가로되 「창녕성씨 보첩을 살피니 성달생(成達生)의 아들 승(勝)은 무과로 병사 벼슬을 지내고 도총제(都摠制)가 되었다가 병자년에 화를 입었고 딸은 조숭문에게 출가했는데 그는 순창인으로서 병사(兵 使)를 지냈으며 병자년 성삼문 옥사 때 그의 부자가 모두 화를 입었다」라고 쓰여 있으며, 풍양(豊壤) 조씨 보첩에는 조운개(趙云价)의 女婿, 성달생은 창녕(昌寧) 사람인데 판중추(判中樞)로 아버지는 문숙공(文肅公) 석용(石瑢)이요, 아들 부총관 승(勝)이 그 아들 삼문과 함께 병자년 화를 입었다 하였고, 또 아들은 참군(參君) 승(塍)이며 사위는 참판 청주(清州) 한혜(韓惠), 전직(殿直) 남평(南平) 조절(曺楶)이며 병사 조숭문(趙崇文)은 아들 철산(哲山)과 더불어 六신이 순절할 때에 함께 화를 당하였다 하였다. 내가 이에 일어나 탄식하되 아! 절도공 부자가 六신의 난에 함께 죽었다는 증거가 확실한데 조씨의 보첩에 빠뜨리고 쓰지 아니하였으니 아! 그 숨긴 것이 더욱 나타났고 마침 그 참화의 준엄함을 보겠도다. 성씨의 보첩은 홍치(弘治) 계축년(一四九三)에 이루어진 것인즉 병자년 六신의 난으로부터 겨우 三十八년만에 만들어진 것이다. 용재(慵齋) 성현(成俔)이 서문을 지었는데 성공은 세조 八년 임오년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병자년의 일을 눈으로 직접 보았을 것이니, 절도공 부자가 함께 六신의 난에 죽은 것을 더욱 크게 밝힐 것을 밝혀서 비교하여 나타냈을 것이다. 슬프다. 저 절도공 부자 및 六신과 같은 사람은 옛날 말대로 살아서 뜻을 같이 하고 죽어서 함께 절할 자 인데, 조씨의 보첩에는 빠뜨리고 쓰지 아니했으니 먼저 이른바 숨긴 것이 더욱 나타난다고 한 말이 더욱 믿어지지가 않는가. 아! 저 六신은 이미 표하여 세상에 나타나고 절도공 부자는 홀로 포양이 안 되었으니 이는 나라에서 은전을 빠뜨린 것이라 하겠다. 부정공의 충효 절행은 이미 재포할 것이 있으며 또한 아들과 손자가 어질어 잘 계승하고 있는데도 아직껏 겸천사에 철향(腏享)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고을 인사의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길가는 사람마져도 배회하며 한숨짓지 아니할 자 없을 것인가. 내가 또 부정공의 묘갈문을 읽어보니, 글은 곧 미호공(渼湖公) 김원행(金元行)이 지 은 글로 특히 「병사의 아들은 철산인데 부자가 세조(世祖)의 세상을 당하여 함께 六신 의 일에 참여하여 죽었다.」라고 썼고, 또 말하되 「선생의 충효는 홀로 그 몸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집안을 대대로 이어온 것이 또한 이와 같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아마 그 뜻이 또 절도공 부자의 죽음을 슬퍼하여 한때의 그늘이 지나 장차 만세 신자의 권징(勸懲)이 될 것이기에 내가 이를 위하여 몇 번이고 반복하였다. 내가 이미 겸천의 정려에 참배하고 거듭 절도공 부자의 충효 대절이 그 아름다움을 이은 것이 감동한 바 있으나, 당시의 일이 자상하지 못한 것은 문적이 아주 없어진 때 문이다. 다행히 창녕(昌寧), 풍양(豊壤) 두 씨족의 보첩은 조씨의 빠뜨린 글을 증거할 것이요, 뇌연(雷淵), 미호(渼湖)가 한 번 아니고 여러 번 썼으니 여기에 상고할 수가 있겠으며 조씨 문헌의 기록이 이로써 영원히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현범(顯範)이 울먹이며 사려하여 가로되 『불초가 마침내 스스로 밝지 못하고 어질지 못한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원하건대 이를 기록하여 도와 달라』 하므로 내가 또 강개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마음에 감동된 바를 절도공 부자사실기의 뒤에 쓰노라. 시년(是年冬) 광산후인(光山後人) 김복현(金福鉉)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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